정보가 모이고 흐르며 재생산되는 "열린 플랫폼"
경상남도 공익활동지원센터 소식지 0821
경상남도 공익활동지원센터는 지역 1세대 선배 활동가 10명을 멘토로 모시고 선배에게 길을 묻다-사람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역의 누구나 5명 이상이 모여서 사람책을 신청해주시면 멘토단으로 모신 10명의 선배분들과 만남을 가질수 있습니다(멘토단소개)
그 첫번째 멘토(사람책)활동을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선생님과 촛불시민들께서 열어주셨습니다. 그 기록을 이춘 선생님께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사람책"
선배에게 길을 묻다 - 김영만 선생님
이춘 작가님 블로그에서 옮겨왔습니다.
2020년 8월 19일 저녁 7시에 열린사회 희망연대 사무실로 14명의 시민들이 방문했다.
1945년생 시민활동가 김영만의장님과 만나 인생 선배에게 길을 묻기 위해서 모였다.
작은 사무실의 테이블을 치워 자리를 마련하고 프로젝트와 스크린을 설치되어 있었다.
김숙연 사무처장이 손님맞이를 위해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조그만 시민단체의 낡은 사무실을 쓸고 닦고 했을 것이다.
작년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를 위해 알음알음으로 여의도로 서초로 같은 버스에 몸을 실었던 인연으로 알게 되어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까지 함께 했던 열혈시민이다.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만나면 좋고 반가운 사람들이다.
머릿수 하나 보태는 것으로도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정의로워 질 수 있다면 열일 제치는 사람들이 먼저 시민활동의 길을 걸었던
김영만 의장님께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을까?
솔직히 인향만리 사업에 작가로 참여하기 전까지
같은 지역에서 오래 살았건만 지역의 친일청산, 적폐청산을 위해 분투했던 시민단체에 대해 무심하게 지나쳤다.
희망연대는 조두남 기념관 개관의 저지를 위해 밀가루를 투척하고, 이은상의 독재부역을 상기시키며 이은상 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개관하도록 싸웠다. 3.15기념관에 걸린 박근혜 사진에 케찹을 뿌린 사건들을 신문지면에서 보긴 해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냥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직장을 끝내고 합류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우리는 1999년에 창립된 열린사회 희망연대의 20년 활동 동영상을 보았다.
희망연대가 처음 한 사업은 냉전구호판 철거였다. 그러고 보니 자나깨나 불조심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간첩신고 구호판이 사라졌다.
그 냉전구호판이 철거되었어도 빨갱이 타령은 여전하다. 하지만 어쩜 그 빨갱이 타령은 반공으로 체제를 유지하려던 독재정권이 남긴 부산물이다.
조두남기념관 개관식장에서 황철곤 시장에게 밀가루를 투척하고 김영만의장은 경찰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이 아직도 잔상으로 남는다.
누구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립군을 때려잡기 위해 불렀던 일본 관동군의 군가가 선구자로 둔갑한 지도 모르고 비장하게 선구자를 부르는 일에 경종을 울린 것은
그런 투쟁의 성과이다. 이라크 전쟁 반대를 위해 인간방패를 파견하거나 북한선수를 응원하기 위해 아리랑응원단 모집은 지방의 작은 시민단체의 사업으로서는 놀라웠다. 작지만 강할 수 있고 약하지만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희망연대의 강하고 위대했던 사업에도 감명을 받았지만
김영만의장님과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울렸다.
첫번째 질문은 지금까지 오랜 시민활동을 하면서 갈등이 없었는지
지금까지 활동을 할 줄 알았냐는 질문이었다. 솔직하게 답변하셨다.
김영만 의장님은 멘토라고 하지만 많은 인간적인 약점과 실수를 한 사람으로서 특별히 멘토가 될 이야기는 없지만
치질 수술까지 13번 수술을 해 의학적인 조언은 많이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갈등은 수도 없이 많이 했고 희망연대도 일년만 하고 문닫으려고 했다고 하셨다. 지금까지 할 줄은 전혀 몰랐고 이것외에 할 줄 아는 것도 할 일도 없어서 계속한다고 하셨다. 학벌이 없어 정권이 바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근데 김영만의장님은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시다. 항상 계획이 있으시다.
이야기를 꺼집어 낸 의도와 목표가 있으셨다.
수술이야기로 시작한 이야기는 김영만의장님이 시민운동을 하는 목표로 연결되었다.
김영만 의장님에게 1970년대는 지옥이었다.
월남전의 트라우마로 건강과 마음 어느 하나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정을 꾸렸지만 경제적으로 궁핍했다.
자식의 이름에 아비의 소원을 담았다.아들만은 제발 모든 일이 시원하게 잘 풀리라고 시원이라 지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미국이든 어디든 새로운 땅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미국에 이민가기 위한 기술을 익히기 위해 정동 mbc 사옥의 호텔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하다 허리를 다쳤다.
직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쳤지만 해고를 통보받자 격렬히 분노했다. 허리디스크란 병명이 일반화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디스크로 진단한 의사가 구세주 같았다. 하지만 그 구세주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수술을 했지만 하반신 마비가 왔다. 그때 구로동 칼빈 소총사건이 생중계되었다. 경찰에 쫓기자 가족 인질극을 벌이며 태양처럼 살라고 지어주었던 인질범의 아들 태양이를 쏘고 그 인질극은 끝났다. 김영만의장님도 그 심정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아프면 치료는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인간이 잘 때는 발뻗고 몸을 뉘일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는 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냐고 절규하고 싶었다.
작가로서 김영만의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가슴 아팠지만 너무 아파서 감히 펼치기 어려웠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가장 탐이 났다.
김영만 의장에겐 가장 비참하고 초라했던 시절이었다. 나도 한때 인생의 패배자, 낙오자처럼 여겨져 해가 뜨는 것이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또 지금도 인생이 쓰고 아린 사람들이 많다. 실오라기같은 희망이라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김영만의장님의 이야기는 위로와 희망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김영만 의장님은 그 후로도 경제적으로 재기하거나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 터널에서 빠져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가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위대해졌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참여하다 보니 내가 아는 사실만으로 과장하거나 강요하나 싶은 자기검열에 빠진다.
하지만 나에게 위대함은 큰 업적이나 완벽함이 아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는지의 거리였다.
두번째 질문은 우리 사회 적페의 뿌리를 더듬어보면 친일 청산이 되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그 뿌리가 너무 강고해서 어떻게 하면 75년째 묵혀온 친일청산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였다.
이 질문에도 김영만의장님은 솔직하게 답변하셨다. 희망연대가 20년간 줄기차게 친일적폐 청산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결코 청산되지 않을 것 같다는 패배감에 젖을 때가 있다고 말문을 여셨다.
" 친일적폐는 코로나와 같다. 철저히 방역을 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 또 어디에서 발발할 지 모르는 코로나와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다. 조두남기념관을 저지시키기 위해 희망연대회원 10여명이 경찰에 연행되고 자신도 구속되어 마산음악관으로 개관되었다. 하지만 작년에 창고에 쳐박혔던 조두남의 흉상과 악보가 다시 버젓이 전시되었다고 제보를 받아 또 한바탕 난리를 쳐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친일을 청산 하려는 우리의 힘이 커서가 아니라 작년 3.1운동 백주년이란 시기성의 힘이었다고 한다. 친일 세력은 지역의 기득권 세력으로 재생산되었고 코로나와 같은 전염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백신이 필요하다. 그것이 조례 제정이다. 친일 연관 기념사업회가 시로부터 어떤 재정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자기 돈 내면서 기념사업회 하지 못하고 그러면 재생산되지 못한 제도적 장치가 조례 제정이다. 다행히 경남 도의원 중 희망연대 회원이 있어 최근에 경상남도 대일항쟁기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제정 토론회가 열렸다.( 2020.8.11)"
여기 참석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요즘 시국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하셨다.
김영만 의장님의 어린 시절 광견병이 유행했다고 한다. 그 병이 무서웠을 뿐만 아니라 치료과정도 너무 아프고 힘들어 치료를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때 광견병을 때려 잡았던 방법은 마을 사람들이 똘똘 뭉쳐 미친개를 보면 때려 잡았다는 것이다.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답이라고 하셨다.
모였던 사람들은 인향만리 사업이 무엇인지 또 멘토와 멘티의 만남의 취지가 무엇인지 자세히 모른다.
단톡방에 공지로 올렸지만 그 사업때문에 그 취지때문에 모인 것은 아니다.
단톡방에 올린 글이 이들의 심사를 말해준다,
"맨 정신으로 삶기 힘든 세상입니다. 정말 조용한 곳에서 더러운 꼴 안보고 쉬고 싶다."
"새옹지마, 전화위복, 비온 뒤에 땅이 굳지요."
어느 날은 분노로 치를 떨다 잠을 설치고 또 어느 날은 세상사 만사가 싫어 더러운 꼴 안보고 아니꼬운 꼴 안보고 싶다고 진저리를 친다.
하지만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 끝까지 살아내는 우리 인생사의 오랜 정답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