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0일 월요일

경상남도 공익활동지원센터 소식지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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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공익활동지원센터 소식지 08.10

인권,자주,평화를 위하여 이경희대표2

빛과 어둠, 어느 것이 진짜 세상인지? 

큰아버지댁과 할머니 대가족  속에 자랐다.

<출처> Late Bloomer 님의 블로그(클릭)


이경희에게 어린 시절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철이 늦게 들었고 둔한 것이 혼란한 데서 성장한 탓이라 여겼다. 

이경희는 1948년 12월 2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되던 해에 태어나 1년 반 만에 6.25가 터졌다.

피난 길에 어머니 등 뒤에서 경기를 몇 번이나 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가족 모두가 서울에서 대구까지 피난을 갔던 것은 큰아버지가 대구에 계셨던 탓이다.

큰아버지는 의사였다. 일제 강점기 대구 의전을 나와 대구에서 개업했다.

큰집은 3층 건물의 큰 병원이 딸린 ㅁ자형 기와집이었다.

하지만 이경희 대표의 집은 피난민 수용소 단칸방이었다.

그 동네는 가난한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피난민이 살던 한적한 마을에는 학교가 없었다. 주소를 큰 집에 두고 큰 집 근처 학교를 다녀야 했다. 동네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거리였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거리에는 고향을 잃은 사람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로 전쟁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들은 배고팠고 헐벗었다. 먼 학교를 걸어가는 어린 경희에게도 그것이 보였다. 불쌍하고 가여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피난촌 아이들은 학교를 들어간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때 같이 놀던 아이가 어느 날 동네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공장으로 식모살이나 애 보기로 마을을 떠났다. 가난한 집에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했다. 좀 더 크면 공장으로 가거나 남자아이들은 구두통을 메고라도 한 푼이라도 벌어 식구 건사를 해야 했다. 가난은 아이들을 일찍부터 삶의 전쟁터로 떠밀었다.

너무 덥거나 추울 때 몸이 약한 경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큰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릴 땐 큰 집도 피난민 수용소 둘 다 자신의 집이었다. 철이 들면서 큰집과 자신의 집이 비교가 되었다. 큰 집은 너무 환하고 따뜻했다면 부모님이 사는 집은 석유 호롱불을 켜는 집이었다. 빛과 어둠처럼 깜깜한 곳과 환한 곳으로 대비되었다. 어느 곳이 진짜 세상인지 혼동스러웠다.

친구들은 서울말을 하는 경희를 놀렸다. 생긴 것만큼 다른 것을 숨길 수 없는 것이 말씨였다. 큰 집 사촌 언니, 오빠들도 경희를 사랑했지만 경상도 말씨를 쓰는 사촌과도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문화가 존재했다. 큰어머니는 대구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평양 출신이었다. 학교에서도 서울 말씨는 경희를 친구들로부터 주목받게 했다. 몸만큼 마음도 약한 경희는 친구들의 주목을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이 꺼려졌다. 경희는 말씨로 주눅 들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시민운동을 하면서 자주 기자회견에 나서야 했고 집회에서 연사로 나서야 할 줄 몰랐다.


자주,인권, 평화를 위하여 이경희대표3

격정의 시대를 살았던 큰아버지와 아버지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신식 교육을 시켰다. 대목으로 서울의 계성중고등학교를 지으셨다. 일제강점기하에서도 할아버지는 자신의 기술로 경제적 부를 이루었다. 혼란한 시절 전문적 지식은 자식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리라고 믿으셨던 게다. 하지만 아들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고 제적당했다.

큰아버지는 수재였고 서울에서 가장 명문인 일본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제일고보를 다니셨다. 하지만 학생운동으로 제적을 당했다. 할아버지는 큰아들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고, 큰아들은 이번만큼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대구의전 진학을 권했고 의사로 만들었다.

둘째 아들인 아버지도 공부를 잘 했지만 운동도 잘했다. 식민지 청년으로 일본 학생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선 복싱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었다. 형의 전력으로 제일고보에 입학할 수 없었다. 다른 학교에서 신사 참배하러 갔다가 담배를 피웠다가 제적을 당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또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일본에서 아버지를 유혹한 것은 공부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한국유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던 데 비해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강제 결혼만은 피할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가 대구의 하숙집 딸과 결혼한 것이었다. 작은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 누군가의 밀고로 대구에 투옥되고 옥사하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대구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경상도 며느리를 반대했으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열렬히 연애했고 결혼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둘째 며느리만큼은 자신이 골라 결혼이 준비되지 않은 아들과 결혼시켰다. 어머니의 친정은 평양이었다. 1944년에 태어난 오빠를 안고 어머니가 친정에 몸조리를 하러 간 사이에 38선이 그어졌다. 갑자기 철도가 끊기고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는 처지에 어머니는 산 넘고 물 건너 남쪽에 있는 아버지 곁으로 왔다.

38선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고 했을 때는 필사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불화했다.

해방 이후의 정국도 같았다. 많은 독립지사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면서도 바라고 바라던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해방의 기쁨보다 오히려 더 큰 슬픔과 아픔을 주는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혈기방장하던 젊은이들은 의기를 맘껏 펼칠 수 없었다.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전쟁이 터지고 대구로 피난 오게 된 아버지에겐 대구는 임시거처였다. 형님이 대구에 있었지만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피난민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유학한 고학력에도 아버지는 인쇄업으로 6남매를 먹이고 입히며 사느라 피난촌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피난촌을 벗어나자 아버지는 병석에 누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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